장승 이야기

사천 가산의 석장승

헛발질 어중개비 2008. 4. 13. 18:55

 

 

 

 

                                             가산의 마을안 고개의 장승배기

 

 

 

                 사천 가산의 석장승


 사천읍에서 점심을 마치고 13시 10분에(1992. 6. 21) 출발하여 가산으로 향했다. 사천군 축동면 가산리로 가는 길은 국도와 고속도로 두 길이 있는데, 옛날의 그 길이 아니어서 혼란스러웠다. 국도인가 싶어서 들어갔더니 순천행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길이어서 얼른 되돌아 나오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그러다가 가산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진입로를 찾아 진입하여 달렸더니 10분쯤 되어 이내 가산에 도착했다. 이곳은 가산 오광대가 전승되는 고장으로 유명하고, 석장승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는 먼저 가산 오광대의 인간문화재 한윤영(韓允榮, 남, 73세)씨 댁을 방문했다.

 내가 가산에 처음 간 것은 1976년도였는데, 그 때 이미 이 마을 분들을 만나 뵌 적이 있기 때문에 한씨를 만나 뵈니 그때보다 많이 노쇠하기는 했지만 얼른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지금 허리 디스크 때문에 누워지내는 때가 많다고 했다. 우리가 방문한 그 날도 그는 자리 보전을 하고 있었다. 좀 있으려니 연락이 되어 인간문화재인 김오복(金五福, 남, 75세)씨가 노구를 이끌고 나타났다. 그도 예보다 역시 많이 노쇠했는데, 기침이 심하여 목에 쇳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세월이 무심하게도 인간문화재를 녹슬게 만들었구나’ 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조금 있으려니 가산 오광대 회장 한종기(韓琮基, 남, 63세)씨가 와서 자리는 더욱 화기애애하였다.

 우리가 온 목적이 가산의 고색창연한 석장승을 조사하러 왔음을 알리고 현장으로 나섰더니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라 모두들 따라 나섰다. 가산의 석장승은 이문(里門)의 수호신으로 정확한 설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약 2백 년의 역사는 되지 않겠는가 했다. 김오복 씨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어릴 때 마을 입구에 목장승이 서 있음을 본 적이 있다고 하나, 한윤영 씨는 자기는 목장승을 본 적이 없고, 어릴 때부터 석장승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두 분 중에 한 분은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아니면 두 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석장승과 목장승이 다 서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가산마을입구 남자 장승(외상신장)

             

 

 가산은 자연 땀 세 개가 합쳐져서 가산리를 이루고 있는데, 용산(龍山)이 45호, 용수(龍首)가 30여 호, 가산이 52호로 모두 127호로 한 마을이 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정초에 길일을 택하여 마을의 중심 우물인 ‘방갈샘’에 제사를 지낸 후 8개의 석장승에도 제물을 차려 장승제를 지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석장승에 대한 신앙심이 강하여 장승에게 부정탈 일이나 불경적(不敬的)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사시사철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장승을 대한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잘 모시지 않으면 재앙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해마다 연초에 장승제를 지내고 있으며, 제주(祭主)로 뽑힌 사람은 부정 탈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한다. 혹 부정탈까 봐서 제주가 되기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종기 회장이 귀띔해 주었다.

 가산리의 석장승에 대한 안내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가산리의 석장승


 문화재의 종류 :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3호

 문화재의 소재지 : 경상남도 사천군 축동면 가산리 

 장승은 건립된 위치, 관리자, 소유자, 신앙의 대상자에 따라 사찰 장승, 마을 장승, 공공 장승으로 분류하며, 공공 장승은 위치에 따라 성문(城門), 병영(兵營), 관로(管路), 풍수보비(風水補備), 해창(海倉) 장승으로 나눈다. 가산리에는 수로 연변의 조창(租倉)과 해운을 수호하고 역병의 퇴치를 위해 마을의 여러 곳에 석장승 8기를 세웠다. 이곳 장승은 앞뒷면을 조각하여 관복을 입혔다. 손에 홀(笏)을 쥐고 있으며, 남장승은 관모를 썼고, 여장승은 머리 위쪽에 뿔 같은 2개의 장식을 달았다. 남장승 2기씩 두 곳, 여장승 2기씩 두 곳에 세웠는데, 마을 입구의 여장승 2기는 도난을 당하여 근년에 새로 깎아 세웠다. 장승의 크기는 높이 82~119cm, 폭은 35~109cm로 다양하다.

 

 

 

                                 

                                                         가산마을 입구 여자 장승(외하신장)

 

 

 

 가산 오광대회장 한종기 씨가 제공해 준 자료에 의하면 이곳 장승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⑴내상신장(內上神將) 

   ①성별 : 남  ②수량 : 2기  ③위치 : 마을 안의 언덕 위  ④크기 : 높이~90cm, 둘레 95cm

 ⑵내하신장(內下神將) 

   ①성별 : 여  ②수량 : 2기  ③위치 : 마을 안의 언덕 아래 당산목 아래  ④크기 : 높이~76cm, 둘레 92cm

 ⑶외상신장(外上神將) 

   ①성별 : 남  ②수량 : 2기  ③위치 : 마을 입구 길 위쪽  ④크기 : 높이~118cm, 둘레 110cm

 ⑷외하신장(外下神將) 

   ①성별 : 여  ②수량 : 2기  ③위치 : 마을 입구 길 아래쪽  ④크기 : 높이~85cm, 둘레 90cm 

 

                                              

 

                                                               마을 안의 남자 장승(안쪽 상신장)   

 


 

 가산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로 지정돼 있는 가산 오광대가 유명하다. 이 민속 가면극은 ①오방신장 과장 ②영노 과장 ③문둥이 과장 ④양반 과장 ⑤중 과장 ⑥영감 할미 과장으로 되어 있는데, 해마다 정월 보름날 놀아왔다고 한다. 1974년에 경남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고, 1980년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다. 그 후 이곳 오광대의 전수를 위해 국가에서 1985년에 전수관을 지어 주었다. 가산의 마을 뒤편 양지바른 언덕 위에 2층 규모의 제법 큰 전수관을 보기 좋게 지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비가 새고, 지하실에 물이 고여서 그곳을 방문한 필자는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다. 관계 당국에서 전수관 관리를 위해 운영비 월 15만원을 지급하고 있으나, 턱없이 모자라서 어쩔 도리가 없는 형편이라고 했다. 경상남도나 사천군에서는 보조비가 전혀 없고, 다른 기관에서도 전혀 보조금을 주는 데가 없어 관리에 속수무책이라 했다.

 오후 4시쯤에 전수관 방문을 마쳤다. 이제 떠나려는 우리를 한 회장이 붙잡고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오랜만에 왔으니 좀 쉬어 가라는 따뜻한 배려였다. 한 회장 사모님은 어느새 생선회와 막걸리를 마루로 내다 놓았다. 한 회장의 댁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는데, 아침에 바다로 나가면 생선 몇 마리 건지는 것은 별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들은 막걸리 잔을 들면서 즐거운 담소를 나누다가 장승제를 지낼 때 축문을 읽는 문제로 옮겨  갔다. 한 회장 댁에는 오래되어 색깔이 누렇게 변하고 손때가 묻은 필사본 축문책이 한 권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서 장승제의 역사도 과연 깊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광대 기능보유자 김오복 씨는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마음만은 이팔청춘이라면서 신로신로(身老身老)하나 심불로(心不老)하더라고 곧잘 농담을 했다. 즉 몸은 늙었으나 마음만은 젊었다는 이야기다. 한윤영 씨의 이야기는 가산 오광대가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을 당시는 모두 5과장이었으나, 중간에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어쩌다가 과장이 늘어나 지금은 6과장이 되어 있다고 불평 반, 푸념 반의 말을 했다. K 박사님도 추억담을 얘기했다. 10년 전에 이곳에 왔다가 바로 이 댁의 건넌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한종기 씨가 몸소 바다에 나가 살아서 퍼덕이는 생선을 잡아와 회를 쳐 놓았지만, 그 좋은 진미를 치아가 탈이 나서 많이 먹지를 못해서 너무 미안하더라고 해명을 깃들인 추억담을 털어 놓았다.

 

 

                                                     마을 안의 여자 장승(안쪽 하신장)

 

 나는 새벽에 차를 몰고 나와 오랜 시간 운전을 하고 다녔기에 오후가 되니 피곤하기 시작 했다. 마음 같아선 생선 안주에 시원한 막걸리를 한 잔 했으면 피로가 삭 가실 것 같건만, 갈 길이 먼지라 그럴 수는 없었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친한 사람들을 만나 술판을 벌일 때가 가장 난처하다. 이러한 사정을 눈치 챈 한 회장이 닭장으로 가더니 달걀 두 개를 꺼내와 나보고 먹으란다. 요즘 세상에 달걀이 무슨 고급 음식이겠는가 마는 마음 쓰는 그 정이 훈훈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그 달걀을 먹지 않아도 피로가 삭 풀리는 것 같았다. 한 회장은 조상 대대로 이 마을 이 터에 살아오면서 4대째 가산 오광대에 참여하여 놀이 전승에 앞장서 오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아끼며 전수하는 데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는 분이었다.

 우리는 좀더 담소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벌써 6시가 지나 있었고, 갈 길이 멀기에 아쉬운 작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시 20분에 그곳을 출발하여 남해고속도로에 차를 진입시켰다. 두 시간이 조금 지난 8시 반에 부산에 도착하여 K 박사님 댁의 근처에 있는 ‘기와집’이라는 한식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박사님은 이 집의 특미 술인 장어 쓸개주를 몇 잔 하셨기에 취기가 약간 돌았다. 자꾸 더 드시고 싶어 하시기에 내가 말렸더니, 예쁘장하게 생긴 주인 딸이 우리를 보고 방긋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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