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이야기

벽송사 목장승

헛발질 어중개비 2008. 4. 13. 18:49

   

                                                                                     지리산 함양 벽송사 전경

 

 

 

                                               지리산 벽송사의 목장승


  함양의 마천면 의탄리에서 역사 깊은 물레방아를 조사하고, 거기서 십 리쯤 시내를 따라 아래로 내려오니 추성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유명한 절 벽송사(碧松寺)가 있다고 했다. 날씨는 흐려져 비까지 뿌린다. 산쪽으로 계속 오르면 얼마 안 가서 절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고 했으나, 오트바이로 미끄럽고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모험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가보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가 있으랴! 미끄러지고 넘어질 각오부터 하고 산을 오르려고 가속 핸들을 돌렸더니 차는 천천히 출발을 했지만, 내가 힘이 없다. 그제서야 점심을 남원 산내에서 빵 한 조각으로 해결하고, 여기까지 먼 길을 왔음을 깨달았다. 답삿길에 나서면 왜 그리 먹을 시간조차도 없는 것일까? 한참을 올라 벽송사로 들어가는 산문으로 들어서려는데 길가에 서 있는 오래된 나무 장승이 양쪽에 서서 길을 지키고 있음이 보인다.

 

  이제 길이 험하여 오트바이는 더 진입을 할 수가 없다. 나무 밑에 비가 덜 뿌리는 곳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 가방을 내려 산문쪽으로 오른다. 10m도 못 가서 숨이 차서 헉헉대었다. 걸어오는 것보다 기계(차)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얼마나 빠르고 쉬운지를 절감하면서 계속 올라가야 했다. 드디어 목장승 앞에 섰는데, 그 험상궂은 얼굴의 장승이 비 맞고 힘이 빠져 지친 나그네를 맞아 준다. 세월과 비바람의 풍상곡절을 이기지 못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흉물스런 모습으로 커다란 눈을 뜨고 있으니, 인정이란 통하는 사람끼리 통한다고, 우리것에 미쳐 이렇게 돌아다니는 허기진 나그네를 이 무심한 장승이 인적도 없는 절간의 산문에서 사람을 알아보고 반기고 있는 것일까?

 

 

 

                                                         지리산 벽송사 입구의 수문장 장승

  

  왼쪽에 서 있는 것이 ‘금호장군(禁護將軍)’이고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 ‘호법대신(護法大神)’이다. 금호장군은 키가 본래는 4m 정도 되었던 것이라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아랫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썩어지는 바람에 장승의 키가 그 반인 2m 정도로 줄어들었다. 거기다 몇 년 전에 산불이 나서 그마저 윗부분이 타버려서 지금은 키가 1.75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장승들은 모두 밤나무로 만들어졌는데, 몸통의 둘레는 125cm 정도가 되므로 장승으로서는 상당히 굵은 편이다. 이 장승의 특징은 얼굴이 크고 길며 눈알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와 있고, 코도 주먹코로 뭉쳐져 있는데, 이들이 많이 돌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거기 비해 입은 평면적으로 처리되어 있어, 그 흔하게 표현되는 이빨이 보이지 않고, 입술을 다물었지만, 양옆 부분만 위로 벌려져 있는 모습이다. 가슴부분에서 아래로 禁護將軍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호법대신은 키가 2m, 둘레는 130cm로 왼쪽에 있는 금호장군보다는 키가 훨씬 크다. 이 장승도 원래는 왼쪽 것과 같이 키가 컸겠으나, 역시 세월 때문에 썩어서 낮아진 것이다. 머리의 모양은 짱구처럼 이마와 머리가 상당히 크게 만들어져 있고, 눈과 코는 왼쪽의 금호장군처럼 퉁방울에 주먹코이다. 왼쪽 것과 차이가 나는 것은 일자로 다문 입이어서 역시 이빨은 보이지 않으나, 입술의 아래위로 수염 같은 것이 쭈뼛쭈뼛하게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턱 밑에도 수염이 무성하게 조각되어 있다. 몸통에는 ‘護法大神’이라는 한문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이 장승들은 벽송사가 건립된 1520년 뒤에 세워졌다고 하나 전설이고, 일제강점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 잡귀 잡신을 쫓고 불법을 수호하는 기능을 지닌 장승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금호장군(禁護將軍)’과 ‘호법대신(護法大神)’이라 써 놓은 것을 보아도 악귀로부터 절을 보호하고, 불법을 보호한다는 장군과 신상임을 잘 알 수가 있다. 장승의 모양으로는 남녀를 구분하기 어렵지만 금호장군에는 수염이 없어 이를 여장군으로 본다면, 호법대신은 남자답게 생긴 데다 수염이 거창하게 조각되어 있으므로 남장군(男將軍)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이므로 굳이 남녀를 구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장승들은 그 역사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상당히 오래되었고, 그 기능이 뚜렷하며, 소박하게 조각된 모습이 마치 시골 할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조형미도 뛰어나다. 그래서 1974년에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해 놓았다. 역사적인 고증이 되는 장승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장승임이 틀림없다. 금호장군의 윗부분이 불타지 않았더라면 국보적인 장승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벽송사 경내에다 보호각을 짓고, 산문에서 옮기다가 현재 여기에다 보관하고 있다.

 벽송사의 목장승은 판소리의 ‘변강쇠타령'(일명 가루지기타령)의 무대가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겨울에 변강쇠가 나무하러 가기 싫어 벽송사 입구에 있는 목장승을 빼다가 불을 때었더니 동티가 나서 급살을 맞고 죽는다는 내용이다. 이것도 다 이곳 목장승이 전국적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일 것이다.

 

 

 

 

 

 

                                             벽송사의 왼쪽 장승 금호장군(화재로 손상)

 


 장승의 조사를 마치고 벽송사에 올랐다. 절은 크지 않으나 심산의 역사 깊은 절이라 조용한 가운데 품위가 있었다. 주지스님은 출타 중이어서 젊은 보득 스님이 있어 나와 나그네를 맞아 주었다. 가랑비 내리는 산사의 호젓한 오후에 우리는 절의 내력도 이야기하고 전설도 이야기했다. 이제 소개하고자 하는 전설은 벽송사를 창건했다는 지엄 스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전라북도 부안 태생의 지암(芝岩)이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글을 깨치고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는 총명함이 있었다. 그러나 지암 소년은 집안이 넉넉지 못하여 절에 들어가 사미승이 되었다. 그는 불법을 공부하다가 의문과 번뇌가 많아서 큰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지리산 법계사(法戒寺)에서 수도하고 있다는 정심대사(淨心大師)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절에 있지 않고 한 여인을 얻어 속세의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였던 것이다. 

 지암은 대사를 만나 제자가 될 것을 허락 받고, 법명을 지엄(智儼)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는 대사가 시키는 대로 일만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정심대사는 무슨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절에는 가지 않고, 속세에서 부인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주-일설에는 당시 조선사회에 불어닥친 불교탄압으로 선승들이 수난을 당할 때 조계종 제4조(祖)인 벽계 정심선사(碧溪 淨心禪師)는 화를 피해 이 골짜기 광점동(筐店洞)에 은거하여 변복에 머리 기르고 공양보살을 부인으로 위장하여 싸리를 꺾어 광주리와 삼태기를 만들어 팔면서 때를 기다린다. 어느 날 찾아온 젊은이가 크게 깨우쳐 법맥을 이으니 이가 곧 벽송(碧松) 지엄선사(智儼禪師)이다.)

 

 

 

 

                                                                          지리산 벽송사의 오른쪽 장승 호법대신

 

  식솔들의 의식주 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다가 싸리 제품인 광주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 그 광주리를 판돈으로 생활을 근근이 해결해 왔다. 대사는 지엄에게 불도를 가르치지는 않고 매일 그를 머슴처럼 부리며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베어와서 광주리 만드는 것만 가르치고,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어느덧 3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엄은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 필요가 없음을 알고, 어느 날 그는 대사의 문하에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어느 날 대사가 출타했다가 돌아오니, 지엄이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정심대사는 떠나는 제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이나 난 듯 그를 보고 소리쳐 불렀다. ‘지엄아, 가더라도 이 불법은 받아가야지.' 하고 그를 불렀다. 깜짝 놀라 지엄이 다시 대사 곁으로 왔다. 

 대사는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길가에 있던 마른 풀 한 개를 뽑아 지엄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때부터 지엄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고, 마음에 평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보니 그의 스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이제 절을 지어 불법을 전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절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그 절이 벽송사였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벽송대사라 불렀다. 절 아래 마을인 추성리에서 그의 스승 정심대사가 광주리를 만들어  시냇가 마을에 내다 팔았다 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광주리점’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줄어서 ‘광점’이 되었다 한다. 세월이 많이 흐른 요새는 이곳을 ‘광천’이라 부르고 있다. 

 

                                                                         벽송사 요사채의 굴뚝

 

 

  벽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경상남도 전통사찰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로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사적기가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1520년(조선 중종 15) 벽송(碧松) 지엄(智儼, 1464~1534)선사가 중창한 뒤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었으며, 이후 많은 선승(禪僧)들이 이곳에서 불법을 닦아 득도했다고 전한다. 1950년 6.25전쟁 때 공비들의 야전병원으로 쓰이다가 아군의 공격으로 불에 타서 큰절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경비 관계로 절을 짓지 못하다가 10년 세월이 흐르고 나서 규모를 줄여 몇 채의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필자가 보득 스님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절을 둘러보니 그리 큰절은 아니었다. 요사채의 뒤뜰에는 장독대가 자리잡고 있는데, 제법 아담하게 장독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그 옆에 키가 그리 크지는 않은 굴뚝이 하나 서 있었는데, 기와를 섞어 흙으로 쌓아올린 솜씨가 보통이 아니어서 그 조형미가 아름다웠다. 그냥 보아서는 굴뚝인 줄 모르겠고, 마치 무슨 탑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아래쪽은 돌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고 그 위에 흙을 쌓아 탑의 몸체처럼 두 층을 만들어 원통형으로 쌓아 올렸고, 삼층째는 기와로 탑의 꼭대기처럼 만들어 두어 영락없는 탑의 모습이다.                            

 

 

 

 

                                      벽송사 장승이 이제는 너무 퇴락하여 장승각에 보관(금호장군과 호법대신)


 

 

  벽송사에는 보물 제474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이 있는데, 이 탑은 탑비(塔碑)나 유래를 전하는 문헌이 없어 건립 경위를 알 수 없는데,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높이 3.5m의 방형(方形) 석탑으로 몸체가 보통 탑보다 가늘게 축조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이 탑의 위치는 원래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놓은 것인데, 현재 대웅전의 건물이 아래로 옮겨지어 지는 바람에 탑만 남게 됐다. 제작수법이 흡사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나, 사찰의 조성 연대가 1520년 조선조 중종 15년으로 되어 있으니, 조선시대의 탑으로 보고 있다. 지표에 넓은 지복석(地覆石)을 놓고 그 가운데에 높은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중석(中石)을 얹었는데, 중석하단에 1단의 얕은 턱을 둔 것은 실상사 삼층석탑과 같은 양식을 보인다.

  벽송사는 고승대덕을 배출한 고찰이었다 하는데, 6.25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 옛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으련만, 전쟁의 참화로 모두 불타고, 우선 급하여 작은 규모로 새로 지은 건물들만 몇 채 있어 지금은 초라한 절로 남아 있다. 불사를 일으켜 새로 지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니 다행이긴 하나 언제일는지 기약은 없다. 5백 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이 전쟁으로 인하여 하루아침에 불타서 사라졌다니 전쟁의 비극은 부처님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옛 절도 불타고, 그 유명하다는 지리산 장승도 불타고……. 불과 인연을 끊지 못하는 그 인연도 부처님의 뜻이런가. 저물어 가는 벽송사를 뒤로하고 나그네는 발길을 돌려 속세로 향하고 있었다.

 

 

 

                                       지리산 벽송사 장승각 모습--이 작은 기와집 안에 오래된 목장승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