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을 잘 다듬어 삼은 고운 짚신 한 켤레
짚신에 대하여
1. 짚신의 정의
짚신이란 짚으로 만든 신발을 짚신이라 한다.
2. 짚신의 역사
(1) 짚신의 역사에 대해서는 유물이나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2) 동남아시아의 수도경작(벼농사)권에서 짚을 이용하여 만들어 신었을 것이다.
(3) 짚신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에는 잘 보이지 않고, 동남아시아, 중아아시아와 남미,
북미에는 그 유물이 상당히 보인다.
3. 짚신을 이용했던 사람
우리나라에서는 신분의 고하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무신과 구두 등의 현대적 신발이 나오기 전까지는
누구나 신었다. 현대적 신발이 나온 이후에도 농촌에서는 짚신을 병행해 신었다.
4. 짚신의 생성
(1) 원시인들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풀잎, 나뭇잎, 나무껍질 등으로 발을 감싸서 다니다가 쉽게 헤어지므로
짐승의 가죽으로 발을 싸매어 신발 대신으로 사용했었다.
(2) 농경시대로 들어와서 짚을 생산하게 되었으니까 짚을 이용하여 신발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짚신이다.
(3) 가장 오래된 짚신은 이집트의 고분에서 샌들형 짚신이 발굴되었는데, 현재 이집트의 투탄카멘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의 왕들은 모두 샌들 종류의 신발을 신었다 한다.
(4) 문헌기록에 보이는 짚신--『후한서』와 『진서』에 동이사람들은 삼베옷에 짚신을 신었다고 기록했고,
『고려도경』에 이들의 짚신은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다고 했다.
또 『세종실록』에 당시 귀족들이 사치스럽게 ‘皮草鞋’(피초혜, 가죽을 댄 짚신)를 신었다 했으며,
『성호사설』에도 ‘菅履 관리’, ‘芒蕎 망교’라 불린 짚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後漢書』東夷傳 韓조에 ‘布袍草履’ 『晉書』四夷傳 馬韓조에도 ‘布袍草履’,
『高麗圖經』에 ‘草履形前低後仰怪’ 『世宗實錄』권 31에 당시 귀족들이 ‘皮草鞋’를 신었다.
『星湖僿說』 上卷 萬物門조에 ‘菅履’, ‘芒鞋’ 등의 용어가 보인다.)
옛날에는 짚신을 많이 만들어놓고 가족들이 필요할 때 신었다.
어른들이 외출할 때 신을 고운 짚신 한 켤레
5. 짚신의 분포
(1) 서역에서는 기원전의 사람들이 신었을 걸로 추정되는 삼껍질로 만든 마혜(麻鞋)와
목화실로 꼬아 만든 면사혜(綿絲鞋)가 발굴되었다.
(2) 일본에서도 우리 것과 거의 비슷한 짚신을 많이 신었었는데, 짚신은 주로 무인(武人), 승려, 어부, 농부들이 많이 신었다.
일본의 東大寺(奈良市)의 짚신 축제 때는 대형 짚신을 만들어 매고 절을 돈다. 岩木山 신사에서는
음력 8월 1일에 큰짚신(大草履) 봉납식을 한다.(길이 9m, 너비 2.7m, 무게 약 1톤) 그리고 사람들은 신사에 들어갈 때 짚신을 신는다.
(3) 멕시코 사람들도 예부터 짚신을 신었었는데, 이들은 지금도 신전에 들어갈 때는 구두를 벗고 짚신을 신는다.
그것이 이들의 전통 관례이다.
(4) 과테말라의 마야문명 유적에서 출토된 인물 동상의 발에 짚신이 신겨져 있음을 보아 여기서도 예부터 짚신을 신었음을 알 수 있다.
(5) 미국의 뉴멕시코주에 살았던 인디언들도 짚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무덤에서 발굴된 서역의 짚신
6. 짚신의 유물
신발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 왔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유물이 많지 않아서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남아 있는 고분 벽화나 몇 안 되는 유물을 보고 그 형태를 알 수 있는 정도이다.
(1) 고구려의 무용총(舞踊塚) 싸영총(雙楹塚) 사신총(四神塚)의 벽화에 신발의 그림이 있다.
(2) 신라의 식이총(飾履塚)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천마총(天馬塚) 양산의 부부총(夫婦塚)에서 금동 신발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짚신은 아니지만 그 모양은 짚신 형태이다. (3) 짚신 장식 잔이 경주에서 출토되었는데,
토기잔의 허리에 짚신을 가로질러 놓았기에 짚신 장식 잔이라 부른다. 현재 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신라 무덤에서 나온 짚신 장식 잔
(4) 1986년 7월, 경주의 용강동 고분에서 상당수의 토용(土俑-흙으로 만든 인형)이 발굴되었는데,
이 토용들이 신고 있는 신발이 사실적인 것이 아니어서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발굴 관계자나,
복식전문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포혜(蒲鞋-부들로 만든 짚신)가 아닌가 보고 있다.
(5) 백제의 무령왕릉(武寧王陵)과 공주의 고분에서도 짚신 모양의 금동신발이 출토되었고,
전남 나주시 반남면 제19호 고분에서도 금동신발이 출토되었다.
(6) 가야에서도 토기 신발이 발굴되었는데, 모양은 가죽신 비슷하다.
투박한 모습이지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경기도 용인 자연농원 안의 호암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남 창녕의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도 있다. 이들은 모두 짚신형의 신발이다.
신라 무덤에서 나온 토기 신발
(7) 중국에서도 짚신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1984년 일본의 동경에서 열린 중국 서역 실크로드전에
서역의 짚신이 출품된 적이 있다. 이 짚신은 1973년 중국의 신강성의 고분에서 출토되어 지금은 신강성 위구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짚신의 크기는 길이가 28.5㎝, 너비 14.0㎝이고, 재료는 삼(麻)으로 되어 있는데, 7세기 무렵 당나라 때의 미투리로 밝혀졌다.
이 신발의 특색은 가느다란 짚신총이 약 60개 가 되고, 총날이 두 줄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짚신의 발등 부분이 발목 부근까지 덮이도록 만들어져 있고, 가운데에 긴 타원형으로 빈 공간이 되어 있다.
그리고 짚신의 바닥이 두 겹으로 되어 있다. 이 짚신은 아마 서역의 사막지방을 여행하는 장사꾼들이 신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정교한 짚신이 1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총 하나 상한 것 없이 생생하게 발견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8)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서역의 짚신이 한 켤레 있다. 이것은 재료가 면사로 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짚신과 흡사하다.
특색은 앞코가 굵은 여섯 줄의 총날로 막아 놓은 것이다. 총날이 두 겹으로 되어 있고,
신바닥이 우리의 짚신처럼 가로로 짜여져 있지 않고 세로로 짜여져 있다. 바닥은 역시 두 겹으로 되어 있다.
이 신발이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고대미술사진집』이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9) 서기 4세기경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1천년에 걸쳐 명사산(鳴沙山)에 돈황굴(敦皇屈)이 조성되었는데,
이 돈황 45호굴의 벽화에 짚신이 보이며, 323호굴 벽화에 고기 잡는 어부의 발에 짚신이 신겨져 있다.
이것은 모두 당나라 시대의 것이라 한다.
(10) 러시아에는 자작나무가 많기 때문에 이 나무의 껍질을 이용하여 자작나무 목피 짚신을 만들어 신었다고 한다. <분량이 많아 이하 생략>
짚신 삼는 도구들
짚신의 각 부분 명칭
농촌의 사랑방에서 짚신 삼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