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이야기

창녕 관룡사의 석장승

헛발질 어중개비 2008. 4. 13. 19:01

 

 

 창녕 관룡사와 석장승

   

 관룡사(觀龍寺)는 경남 창녕군 계성면(지금은 창녕읍) 옥천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화왕산의 거칠은 바위가 험하게 솟아 있는 산세와는 달리 화왕산의 남쪽 양지바른 산자락에 포근하게 안기듯 다소곳이 앉아 있다. 내가 관룡사를 찾아 나선 것은 1989년 8월 19일, 삼랑진과 밀양의 부북, 그리고 창녕의 영산 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나섰는데, 이 날 영산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인 8월 20일, 7시 30분에 일어나서 영산 장터의 식당에 들러 국수 한 그릇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관룡사로 향했던 것이다. 영산장은 이곳의 민속 축제인 3.1민속문화제 때 여러 번 온 적이 있는지라, 옛 장터가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장터여서 몇 차례 답사한 적이 있기 때문에 식사할 만한 곳이 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관룡사 들머리에 세워진 석장 2기

                                    

 

 

 9시쯤 돼서 관룡사에 도착해 보니 절 아래 주차장이 널찍하게 닦여져 있어 찾는 사람이 많이 드나들고 있구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내가 관룡사를 찾은 것은 갑자기 불심이 생겨 부처님을 참배하고 무슨 복이라도 듬뿍 받겠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관룡사의 입구에 서 있는 석장승 2기가 오랜 역사를 지닌 채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보지 않고선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에 오트바이를 세워 두고 한 10분 정도 산길을 따라 올라 갔더니, 돌무더기와 잡목이 덩굴이 엉겨 있는 길목에 아주 우람스럽게 보이는 장승 두 기가 서 있는 걸 보고 기쁨과 함께 반가움이 앞선다. 반가운 마음에 다짜고짜로 카메라부터 갖다 대어 찍고부터 보는 나의 성급함이 전과 다름없이 또 발동이 되었다. 석장승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끼가 피어난 돌의 표면과 비바람에 시달려 변색되어 있는 그 모습만 보아도 예사로 나이를 먹은 장승은 아닌 것 같았다.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관룡사 들머리 출입제한 나무걸이

 


                              관룡사의 석장승


   문화재의 종류 :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6호

   문화재의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문화재의 개요 : 사찰의 장승은 절의 경계, 사찰의 논밭, 사찰 내에서의 사냥이나 어로의 금지 호법(護法) 등을 표시하기 위하여 세우거나, 풍수지리상의 사찰의 나쁜 형국을 좋은 형국으로 바꾸기 위한 비보(裨補)의 압승물(壓勝物) 또는 사찰의 수문신(守門神)으로서 민속신앙을 수용한 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화강석의 거친 돌로, 상투 같은 둥근 머리를 하고, 툭 튀어나온 왕방울 모양의 눈과 주먹코, 아래로 뚫린 콧구멍과 방방한 턱 등이 특징적이고, 몸매가 육중하며, 중량감이 있다. 제작된 연대는 알 수 없고, 크기를 보면, 왼쪽 것이 키 2.2m, 둘레 0.7m이고, 오른쪽 것이 키 2.5m, 둘레 0.8m 정도이다.

 다른 곳의 장승처럼 장승의 몸체 전면에 장승의 이름이 각자(刻字)되어 있지 않아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장승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장승들은 장구한 역사를 지닌 채 오랫동안 관룡사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해온 장승임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겠다. 

 

 

                                                                      관룡사 들머리 왼쪽 석장승        

 

 

 관룡사의 석장승은 거칠게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자연석에 얼굴 윤곽만 쪼아서 조각한 상태로 되어 있는데, 남녀의 구분이 쉽지 않으므로 어느 쪽이 남상인지, 어느 쪽이 여상인지를 구분하기는 좀 어렵다. 전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 것은 몸체가 투박하고 거의 자연석 상태인데, 배 아래쪽 부분이 자연석 상태에서 본래부터 떨어져 나가고 없다. 그래서 배불뚝이 모양이 되고 말았다. 머리의 모양을 볼 때, 관을 쓴 것인지 맨 머리에 상투 모양으로 윗 부분을 혹처럼 조각한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으나, 이마 위에 음각으로 테를 조각한 것으로 보아 모자 같은 관을 쓴 것 같기도 하다. 눈과 코가 뚜렷이 조각되어 있고, 턱을 깊이 파서 강조해 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오른쪽 것은 왼쪽 것에 비해 몸체가 날씬하여 그런 대로 보기에 좀 세련된 감이 없지 않으나, 역시 자연석을 조금 다듬어 길게 형체를 만든 것 같다. 왼쪽 것은 아랫도리를 파묻어 세웠는데 비해, 오른쪽 것은 자연석 받침대 위에 올려놓아 넘어지지 않게 잘 고정을 해 두었다. 돌 받침대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돌 시주를 하여 작은 돌묻이 속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다. 얼굴의 모습은 툭 튀어나온 방울눈과 조롱박을 반쪽 갈라붙인 것 같이 생긴 코의 모양이 인상적이고, 일자로 다문 입이 엄숙하게 보인다. 머리 모양의 역시 맨 머리에 상투처럼 솟아오른 부분이 있는데, 상투로 보아야 할지, 모자 같은 것을 쓴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왼쪽 것과 비교할 때 이마와 머리의 경계선이 없는 것으로 보아 관을 쓴 것은 아닐 것 같고, 머리를 모아 위로 쪽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굳이 남녀의 구분을 짓는다면 왼쪽의 관을 쓴 것 같은 장승을 남장군으로 본다면, 오른쪽의 날씬한 몸매의 쪽머리 장승을 여장군으로 볼 수도 있겠다.

 

 

 

                                                                    관룡사 들머리의 오른쪽 석장승

 

 

 절을 향해 조금 더 올라가니 당간 석주가 양쪽으로 서 있는데, 건륭 38년 계사(癸巳) 10월 목청의조(木廳衣造)(주-건륭 38년이라면 1773년인데, 목청이라는 스님에 의하여 조성되었다는 뜻인 것 같다.)라 기록되어 있다.

 관룡사는 신라 16대 흘해왕 40년(349)에 창건되었다 하나 확실하지는 않고, 진평왕 5년(583)에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중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훗날 원효대사가 1천 명의 중국 승려들을 초치하여 이 절에서 화엄경을 설법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고 전한다. 이 절은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옛날부터 큰절로 이름이 나 있었다. ‘관룡사(觀龍寺)’라는 절의 이름에는 그럴 만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 절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있을 때 꿈인지 생시인지 갑자기 오색 구름이 하늘에 비친 가운데 화왕산 꼭대기의 월영삼지(月影三池)에서 9마리의 용이 승천함을 보고 이 산을 구룡산(九龍山)이라 하고, 절 이름을 관룡사라 지었다는 설이 있다.

 관룡사에는 문화유산이 많다. 대웅전은 보물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고, 약사전(藥師殿)은 보물 제146호로, 석조약사여래화상은 보물 제51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절에서 서쪽으로 500m 정도 위로 올라가면 보물 제 295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선대(龍仙臺) 바위언덕 위에 석가여래 석상(높이 1.9m)이 2m가 넘는 좌대 위에 홀연히 앉아 속세를 굽어보고 앉아 있어 속인들에게 불심을 더욱 깊이 전하고 있다. 그밖에 이 절의 이곳저곳에 옛날에 쓰던 목재의 생활도구가 많이 남아 있어 마치 민속박물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웅전 건물은 지상으로부터 약 2m 정도의 높은 기단 위에 지어져 있는데, 그리 큰 건물은 아니나, 기단 위에 높다랗게 앉아 있으니, 다포식 팔각지붕이 날렵하게 끝 부분이 들려 있는 그 위로 기와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경쾌하게 보인다. 처마를 받치고 있는 서까래와 공포(栱包)의 조각들이 뛰어난 데다 은은한 채색이 한몫을 하여 한층 조화미가 돋보인다. 관룡사의 대웅전에 대한 안내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근간에 다시 가서 찍음(2017년 4월)--할배장승

 

 

 

 

                                                          근간에 다시 가서 찍음(2017년 4월)--할매장승

 

 

 

 

                                                          창녕 관룡사 범종각의 법고 받침대 사자조각

 

 

 

 

                                                                    관룡사 일주문의 봄기운

 

 

 

                             관룡사의 대웅전


   문화재의 종류 : 국보 제212호

   문화재의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문화재의 개요 : 임진왜란 후인 1617년(광해군 9년)에 세운 단층 팔작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다포식이란 공포를 기둥머리에만 짜 올린 것이 아니라 그 중간까지 넣어 공포가 촘촘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일반적 유형이다.

 1965년 이 건물의 해체 보수공사를 할 때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는데, 그에 의하면 1401년(태종 원년)에 창건했으나, 임란 때 소실되어 1617년에 중창했고, 그 후 1749년(영조 25년)에 중수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건물의 앞면이 3칸이고 측면도 3칸이나, 앞면이 30자인데 비해 측면은 25자 남짓하다. 건물의 내부에는 뒤쪽에 치우쳐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위로 대들보가 건너가게 하였다. 고주를 의지하여 불단을 설치했고, 그 상부에 닷집을 달았으며, 천장은 중앙부를 한층 높게 한 것이 좀 특수하다. 건물의 세부 양식은 다포집 계통의 구조인데, 비교적 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관룡사의 대웅전의 웅장한 모습(국보 제212호)

 

 


 관룡사의 대웅전을 앞에서 보았을 때 얼른 눈에 띄는 것이 8짝의 문창살이다. 이 문창살의 모양이 균형을 이룰 뿐만 아니라 상당한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중앙에는 2짝씩 문이 4개 달려 있고, 중간 부분에는 아래위로 네모 창살을 적당한 크기로 넣었으며, 그 사이에는 세로 창살을 넣어서 조형미를 살린 것이 여간 참신하지 않다. 반면에 좌우 양쪽 두 짝의 문은 네모 창살을 전체적으로 넣어서 안정미와 중후감을 주도록 했다. 이는 문 하나에도 조형미를 살리려고 상당히 배려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관룡사 대웅전의 삼존불

 

 

 

 약사전(藥師殿) 건물은 임란 때에 유일하게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건물이라 한다. 건물의 특색은 주심포집의 맞배지붕으로 된 기와집에 삼중 대들보가 얹혀 있음이 특징인데, 서까래도 이중으로 배치되어 위의 것이 사각 서까래인 반면에, 아래의 것은 원형 서까래로 변화를 주었으며, 단청과 불화를 그려 넣어 아주 화려하게 보인다. 약사전에서도 빼놓을 수가 없는 이야기가 문의 창살이다. 얼른 보기에는 투박하고 무심하게 만들어 붙인 것 같으나, 네 짝의 문이 좀 굵은 창살로 똑 같이 맞추어 놓았고, 아랫부분에는 판자를 대어 불화를 그려 놓았다. 그림의 색채는 오래되어 퇴색되었으나, 네 짝의 문 전체가 주는 창살의 조화미는 세련미와 예술미를 떠나, 독특한 인상과 멋을 주는 것이다. 사실 뛰어난 세련미는 없지만 소박하면서도 안정된 네모의 연속이 조금은 중후한 멋을 보여 주고 있다. 약사전 앞에는 모진 세월과 비바람에 시달리고 마모되어 얼른 보아도 오랜 세월을 견디어 왔을 것이라고 보아지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이 시공을 초월한 채 오늘날까지 약사전의 한 모퉁이에서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앞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적혀 있다.


                                                     관룡사 약사전의 삼청석탑


   문화재의 종류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문화재의 소재지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문화재의 개요 : 화강암으로 건조한 방형(方形)의 삼층석탑이다. 암반을 이용하여 하층 기단을 조성하였는데, 각 면에는 두 개씩의 안상(眼像)을 새겼다. 삼층 기단 면석에는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였으며, 옥개석과 탑신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건조 양식과 각부의 수법은 신라시대의 석탑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규모가 약 2m 높이로 줄어들고, 각부의 양식 수법이 간략해지고 섬약해져서 그 건조 시기가 고려시대의 전반일 것으로 추정케 한다.

 

 

                                                      고색창연한 관룡사 약사전과 3층석탑==약사전 앞에 있다.

 

 

 

 관룡사에는 여기저기 민속 가구나 목물이 많다. 약사전 옆의 처마 밑에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알 수 없는 낡은 궤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좀 색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곡식을 넣어 두는 뒤주였던 것 같기도 하고 절에서 쓰는 그릇들을 넣어 보관하는 궤짝인 것도 같았다. 또 다른 쪽 모퉁이에는 구유통 같은 긴 통나무 그릇이 뚜껑이 덮인 채 놓여 있다. 아마 그 옛날 이 절에 손님이 많았을 때 밥통으로 썼던 나무 그릇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밥통은 다른 절에서도 몇 개 본 적이 있다.

 대웅전 앞뜰의 마당을 건너 맞은편에 지어져 있는 큰 누각의 마루에는 나무로 조각된 사자(어쩌면 해태인지, 사나운 개 모양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지만) 모양의 등 위에 작은 원형 받침대를 만들어 거대한 법고(法鼓)를 올려놓았는데, 그 모양도 특이하거니와 그 연륜 또한  오래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누마루의 한 모퉁이에는 나무로 만든 긴 밥상 위에 바루에다 점심공양을 담아 보자기로 싸 놓은 밥그릇이 15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 절 스님들이 아침 공양을 하고, 울력(일, 작업)하러 나가면서 점심 공양을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인지, 아니면 선방에라도 틀어박혀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더 높은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명상하고 있는 것인지…….

 절의 뒤편 대나무 숲이 있는 쪽에 두 칸짜리 기와 건물이 하나 동떨어져 있는데, 현판을 보니 산령각(山靈閣)이다. 산령각이란 보통 산신각(山神閣)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 대신에 산신령을 모신 곳이다. 사실 이것은 불교와는 좀 다른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산신숭배 사상이 있었으므로 굳이 산신각까지 찾아가지 않더라도 절에 오면 부처님과 산신령을 모두 접견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불교가 산신신앙까지 수용하여 불교신자들을 절로 끌어들이는데, 한몫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건물은 크지는 않으나 큰 주춧돌을 사용한 위에 사각기둥을 올렸으며, 둥근 서까래 아래 도리에 단청을 칠해 두었다. 마당에서 올라가려면 세 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건물의 특색은 방 앞에 쪽마루가 없어 문을 열고 올라서는데 신발을 벗는 지면에서 상당히 높아서 들어서기에 불편하다. 왜 그렇게 해 두었는가 하면, 이 건물에 모신 주신이 용신이기 때문이다. 방문 아래에다 큰 구멍을 두 개씩 뚫어 놓았는데, 관룡사를 지키는 용신이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통로를 만들어 둔 것이라 한다. 이것은 어쩌면 신라의 감은사에 만들어 둔 용의 통로인 용혈(龍穴)(주-『삼국유사』에 보면 감은사의 법당 섬돌 밑에 동쪽으로 ‘용혈(龍穴)'이 나 있어 동해용(東海龍)이 된 문무대왕이 이 구멍을 통해 법당에 들어와 쉬어갈 수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발굴할 때 그 특이한 공간을 확인한 바 있다.

    문무대왕이 삼국통일 대업을 이룬 뒤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절을 세우다 완성하지 못하고 타계하면서 내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해서 동해에 장사 지내라고 유언했다. 아들인 신문왕이 그 뜻을 받들어 장사 지내고 이듬해인 682년 감은사를 세웠으니, 이곳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 한 문무대왕의 호국정신과 부왕의 유언대로 절을 완성한 신문왕의 효(孝)가 함께 깃든 절이다.)과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관룡사에는 공양간이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고, 요사채의 부엌을 공양간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 시골집의 부엌이나 다름없다. 오래 된 옛날 무쇠솥과 나무 주걱, 수저 바구니가 부뚜막에 놓여 있다. 그리고 부엌의 벽에는 어느 농가를 방불케 할 정도로 소쿠리와 채반, 키 등이 여러 개 걸려 있어 고향집 광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마당에는 여러가지 석물들도 깔려 있었는데, 절구통과 맷돌 떡판들이 늘려 있었다.

 돌아나오는 길에 절의 담장 옆에 장독대가 있어 구경을 했다. 뒤에는 키가 큰 대나무들이 서 있어 대숲을 이루는 앞에 옴팍하게 자리를 마련하여 장독들을 가지런히 배치하였는데, 그 방향이 남향이라 햇빛이 잘 들고 있었다. 이러한 청정한 곳에서 장을 익히면 장맛 또한 좋으리라고 생각하며 절의 입구쪽으로 향했다. 이 절의 대문은 돌담을 쌓아 작은 성문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석문 위에 기와를 올려 절간에서는 보기 드문 마치 작은 성문 모양의 석문을 형성해 놓았다. 이처럼 독특한 성문을 벗어나 나그네는 다시 속세의 길로 걸어나왔다.

 

 

 

                                                   관룡사 뒤편 바위 벼랑 위의 석가여래불(보물295호)

 


 *붙임-그로부터 13년 뒤인 2002년 7월 31일, 우연한 기회에 그곳을 통과하게 되어 돌장승들이 옛 모습 그대로 잘 있는지를 보기 위해 관룡사 입구의 장승터에 가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절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장승 중 왼쪽 것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고, 오른쪽에 있었던 장승이 왼쪽으로 자리를 옮겨 외로이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유형문화재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개는 이렇게 유실되고, 남은 것은 자리를 옮겨 외로이 서 있다. 이래도 괜찮은지 문화재를 아끼는 한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장승이 있던 부근의 오른쪽 길섶에 돌묻이(돌탑)도 하나 있었는데, 그것도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장승이 지키던 절로 가는 옛길은 거의 망가져 가고 있었으며, 그 왼쪽으로 찻길이 나 있어 그 길을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절 아래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 아래로 경관 조성을 위해 계곡에 못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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