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 이야기

통영의 벅수(돌장승)

헛발질 어중개비 2008. 4. 13. 19:05
                                         통영(충무)의 돌장승(벅수)


 필자가 충무시의 문화동에 자리잡고 있는 돌장승을 보러 간 것은 1976년 5월 7일이었다.

마침 사천의 가산 오광대와 충무의 문화재를 조사하러 가자는 학자들이 나를 초청해 주어 그들과 동행하였다.

그들은 경상남도 문화재 위원으로 있었던 K 교수와 J 교수였는데,

당시 사천과 충무에서 오광대와 다른 문화재를 재점검하러 나가는 길이었다.

그 참에 나도 동행하게 되어 문화동의 이 돌장승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돌장승은 현지에서는 벅수로 부르고 있었으며,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남 통영의 돌장승(일명 돌벅수) 

 

 이 장승의 위치는 충무에서 가장 큰 고건물인 세병관(洗兵舘)으로 오르는 도로의 우측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의 위치는 지금 자리에서 아래쪽으로 약 25m정도의 거리에 서 있었으나(문화동 95번지 123간 자리) 세워진 지 77년만인 1983년 1월 25일에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 확장으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한다. 화강암으로 다듬어진 이 돌장승은 머리 부분이 크고 육중하게 생겼으며, 그에 비하여 아랫도리는 홀쭉하고 연약하여 내려갈수록 왜소해지는 느낌이 드는, 좀 불안한 모습을 한 돌장승이었다. 키는 약 1.99m 정도가 되는데, 돌머리 부분의 둘레가 약 1.56m가 되고, 허리 부분은 1.45m가 된다. 면상의 길이만도 약 80cm가 되니 어굴 부분이 크고 육중함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주-필자는 이 글을 써 놓고 다시 재확인을 하기 위하여 2003년 1월 25일 오전에 통영(충무)의 문화동 현장에 가 보았다. 안내문에는 장승의 크기를 높이 198cm,둘레 160cm라고 적어 놓았다. 필자의 실측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얼굴의 모습을 보면 머리에는 모자 같은 것을 썼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가로로 두 개가 파여 있으며, 눈꺼풀과 눈알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얼굴의 가운데에 주먹처럼 큰 코가 자리를 잡았는데, 눈알과 코의 모습은 삼각형을 이루며 붙어 있다. 하현달 모양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사이로 위의 송곳니가 맹수의 이빨처럼 아래로 날카롭게 뻗쳐 나와 있는 것이 사람의 얼굴 형상에다 입은 마치 호랑이의 그것을 갖다 붙여 놓은 것 같다. 그리고 아랫니가 4개 가지런히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통영 문화동의 석장승 토지대장군

 

 

 입 부분을 보면 맹수의 형상을 연상하게도 되고, 입을 벌리고 아랫니를 드러낸 모습은 금방이라도 침을 흘려낼 것 같아 좀 모자라는 사람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상한 모습이 이 돌장승의 특색인데, 좀 무섭게 생겼으면서도 익살스런 데가 있어 보인다. 전면에서 보았을 때 턱 밑으로 긴 수염 세 가닥이 왼쪽으로 휘날리며 뻗쳐 있는 것도 대단히 위협적이라 하겠다. 귀는 길게 붙어 있긴 하나 입체적으로 튀어나오지 않아 얼른 보아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머리와 수염에는 검은 칠을 하였고, 눈언저리와 입술에는 붉은 칠을 해 놓았다. 그리고 그 아래쪽으로 몸통에는 ‘土地大將軍’이라 음각되어 있는데, 보통 장승에서 흔히 새긴 거친 글씨가 아니라 정자로 또박또박 새긴 것이 정성이 많이 들어 간 글씨이다. 이 돌장승의 앞에는 돌을 깎아 제단을 만들어 둔 것으로 보아 토지신(土地神)으로 숭앙되는 장승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제단의 크기는 가로 60cm, 세로 41cm, 높이 25cm의 화강암을 다듬어 앉혀 놓았다. 토지신이란 집의 건물이나, 마당, 동네, 나아가 논밭까지 관장하는 신이니, 이는 바로 우리의 생활과 직접 연관을 맺는 신이다. 우리 민속에 정월 대보름에 집집마다 다니며 지신밟기를 하는 이유도 이 토지신을 잘 대접하여 제액초복을 빌고자 함이다. 따라서 이 장승은 토지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었거나, 이 지대가 풍수적으로 보아 지세가 약하여 토지신의 주력으로 지기가 왕성해질 것을 바라는 뜻에서 세워졌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장승의 뒷면에 ‘光武十年 丙午八月日同樂洞立’(동락동은 문화동의 옛 이름)이라고 쓰인 걸 보아 1906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글학회의 『지명총람』에는 숙종 27년(1701)에 통제사 유성추(柳星樞)가 세웠는데, 그 뒤 쓰러진 것을 1905년에 다시 세웠다고 했다. 일설(문화동장 소기철 蘇基哲 씨의 전언,-장주근 조사, 1968)에는 370년 전 세병관이 건립되던 때에 동시에 건립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김두하, 전게서, p. 972)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알 수 없으나, 1906년 이전에 세웠던 것을 1906년에 다시 일으켜 세웠거나, 새로 세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승의 뒷면에 새겨진 글자

 

 

 장승이 서 있는 곳의 바로 위 30m의 거리에 ‘통영시 향토역사관’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나그네가 그곳을 둘러보았더니, 현관의 왼쪽에 이 돌장승의 실물 크기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수많은 전쟁기념물과 서적 등을 전시하고 있는 것 외에 돌장승을 실제의 모양대로 만들어 전시했다는 데 나그네는 흐뭇함을 금치 못했다. 실물을 도적맞았을 경우나, 어떤 불의의 사고로 실물이 훼손되었을 때, 이 대체물이 있으면 우선 그 모습을 볼 수 있고, 새로 조각할 수도 있으니,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그네가 그곳을 떠나며 관리 담당자에게 격려를 하면서, 현재의 돌장승 옆을 마을 사람들이 쓰레기 모으는 장소로 이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승이 있는 그 위쪽에 세병관(국보 제305호 )이 있다.

 

 

 

 

 

 

 

                                                     통영 세병관

 

 

 

 


 

                                                                                             통영 세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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